비겁한 방패(들)
암살자(들) 감독의 비겁한 방패(들)
예술이 역사를 다루는 일은 본디 위험한 일이다. 허구는 사실을 대신할 수 없고, 물음은 단죄와 같지 않으며, 상상력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작품은 그 위험을 정면으로 안기보다, 위험을 미리 계산한 뒤 사람 뒤에 숨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풍경이 그것이다.
작품은 1974년 광복절의 총성을 다시 불러낸다. 제목의 괄호 안 ‘들’이 이미 의도를 암시하듯, 한 사람의 범행으로 정리된 기록을 흔들고, 다른 손과 다른 뜻을 슬며시 끼워 넣는다. 물음을 던진다고 말하지만, 물음의 방향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기울어진 물음은 이미 결론의 다른 이름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특정한 결론이 아니라고 한다. 민감한 소재라 고민했다고도 한다. 고민의 흔적은 작품의 뼈대보다, 그 작품을 둘러싼 사람 배치에서 더 뚜렷이 보인다.
수많은 배우가 스쳐 지나간다. 카메오는 때로 예의이고, 때로 우정이다. 그러나 카메오가 많을수록 작품의 정치적 칼날은 흐려지고, 비판은 ‘배우까지 건드리는 일’로 바뀐다. 질문이 작품에 향하지 못하고 얼굴들에 흩어지게 만드는 기술이다. 의도적으로 특정한 맥락을 심어 놓고, 그 맥락이 불러올 파장을 두려워하여 사람 뒤로 물러서는 태도라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계산이다.
시사회의 풍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참석한 이들에게 사인을 받고 방명록을 남기게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죄일 수 없다. 그러나 그 흔적이 동정의 재료가 되고, 논란이 일자 그 흔적 뒤로 숨는 방패가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람의 온기를 먼저 모아 두고, 불길이 번지면 “합리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이라 일축하는 순서는, 예술의 책임이라기보다 위기관리에 가깝다. 작품이 던진 맥락의 무게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맥락을 둘러싼 배우들의 온기만 앞세우는 일은 정직하지 않다.
역사란 산 자의 상상력이 죽은 자를 마음대로 재배치해도 되는 무대가 아니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한 편의 미스터리를 완성하기 위한 재료가 되기 전에, 이미 한 시대의 상처였다. 그 상처를 ‘질문’의 이름으로 다시 열어 보이려면, 적어도 그 질문이 어디로 미끄러지는지를 책임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용기가 없을 때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만들고 나서 배우의 서명과 방명록과 수많은 얼굴 뒤로 숨는 것은, 창작의 자유가 아니라 창작의 비겁이다.
자유는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양심을 대체하지 않는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맥락이 희석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을수록, 그 작품을 밀어 올린 손의 계산은 더 선명해 보인다. 논란이 일자 자신이 심어 둔 맥락을 예술의 권리라고 부르는 태도야말로 실망의 핵심이다.
작품은 남을 수 있다. 배우들의 이름도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방패 뒤에서 던진 돌은, 돌이 아니라 방패의 일부로 기억되기 쉽다. 그것이 이 소동이 남기는 가장 초라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흥행을 만끽하기 바란다. 그러나 그 불편한 속 마음과 혼란도 흥행 못지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