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고구려는 떼어놓을 수 없다
사료로 반박하는 동북공정의 고구려 분리 논리
동북공정식 고구려사 서술의 가장 큰 문제는 고구려가 존재했던 공간만을 강조하면서, 고구려 주민이 멸망 전후 어느 사회로 이동하였고 어떤 국가들이 고구려 계승을 선언했는지를 의도적으로 분리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고대 사료를 연결하면 조선·낙랑 고지의 주민층에서 예와 고구려, 진한과 신라로 이어지는 계통적 연관성이 나타난다. 신라는 건국 단계부터 조선 유민을 구성원으로 삼았고, 이후 여러 차례 고구려 주민을 받아들였다. 통일신라는 고구려 남부의 영토와 주민을 흡수했으며, 고려는 국호와 서경 경영, 국가 외교문서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명시했다. 발해 역시 스스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한 국가라고 선언했고, 그 왕족과 유민은 다시 고려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한국인을 신라계 중심으로 설명하더라도 한국인과 고구려를 별개의 역사집단으로 분리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동종’은 순수한 단일 혈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료가 기록한 계통적 친연성과 실제 주민 이동·혼합·국가적 계승을 의미한다.
1. 조선·낙랑 고지의 주민과 진한·신라는 연결되어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는 진한인이 낙랑인을 ‘아잔(阿殘)’이라 불렀다고 기록한다.
«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
“낙랑인을 아잔이라 불렀다. 동방 사람은 ‘나’를 ‘아’라고 하므로, 낙랑인이 본래 그 잔여인이라는 뜻이다.”»
이는 진한 사회가 낙랑인을 자신들과 완전히 무관한 외부집단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연결된 잔여 주민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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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사로국 건국기록은 그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밝힌다.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是爲辰韓六部。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여섯 촌을 이루었으니……이것이 진한의 육부가 되었다.”»
즉 신라의 출발점인 사로 육촌은 조선 유민이 세운 촌락이었고, 사서는 이를 곧 진한 육부라고 하였다. 신라의 기층 주민을 조선 유민과 분리할 수 없다는 직접적인 기록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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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낙랑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중국계 관리나 이주민만을 뜻하지 않는다. 낙랑군이 설치된 고조선 고지에는 조선시대부터 거주하던 예계 주민이 계속 살고 있었다.
《삼국지》 예전은 예의 군주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에게서 이탈했다고 기록한다.
«濊君南閭等畔右渠。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였다.”»
이는 예가 위만조선의 지배 아래 있던 주민집단이었다는 뜻이다. 같은 기록은 낙랑군 동부도위가 다스린 일곱 현의 주민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
“일곱 현은 도위가 관할하였으며, 모두 예를 백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의 노인들이 전해 온 자기 인식도 기록한다.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그 노인들은 예전부터 자신들이 고구려와 동종이라고 말하였다.”»
이를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조선의 지배를 받던 예 → 낙랑군 동부 일곱 현의 토착 주민인 예 → 스스로 고구려와 동종이라고 인식한 예.
따라서 낙랑이라는 중국 군현의 행정명칭만을 근거로 그 지역 주민까지 중국계로 바꾸어 해석할 수 없다. 행정 지배자는 한나라였지만 주민 기층은 조선시대부터 살던 예였고, 그 예는 자신들을 고구려와 동종이라고 증언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조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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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사서도 신라의 고구려계 주민 유입을 기록했다
《수서》 신라전은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이후 남하한 주민 일부가 신라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爲新羅焉。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옥저로 달아났다. 뒤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남은 자들은 마침내 신라인이 되었다.”»
이 기록은 고구려계 주민이 남하하여 신라 주민으로 편입되었다는 첫 번째 계통의 전승이다.
《수서》는 다시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과정에서 고구려인이 집단으로 신라에 귀순하여 신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고 기록한다.
«高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强盛。
“고구려인들이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신라로 귀순하였으므로 마침내 강성해졌다.”»
따라서 고구려 주민의 신라 편입은 우발적인 소수 망명이 아니라, 신라의 국력을 강하게 만들 정도의 집단적 유입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수서》는 신라 주민의 구성에 고구려·백제·옥저·불내·한·예 계통이 함께 있었다고 하였다. "《수서》 동이열전 신라조 원문" (
db.history.go.kr/ancient/lev…)
문화적 친연성도 확인된다. 《남사》는 신라인의 절하는 모습과 걸음걸이가 고구려인과 비슷하다고 기록한다.
«其拜及行與高麗相類。
“그 절하는 법과 걸음걸이는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다른 중국 사서 역시 신라의 풍속·형정·의복이 고구려·백제와 대략 같았다고 기록했다.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풍속과 형정, 의복은 대체로 고구려·백제와 같았다.”»
이는 왕실의 일시적인 제도 모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절하는 법과 걸음걸이, 의복과 풍속처럼 일상생활에 깊이 자리 잡은 문화가 서로 유사했다는 기록이다. "《남사》 신라전 원문" (
db.history.go.kr/ancient/lev…), "관련 중국 사서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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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릉비도 400년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보낸 사실을 기록한다.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 5만 명의 신라 파견은 양국의 정치·군사 관계가 단순한 원거리 외교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광개토왕릉비 원문" (
db.history.go.kr/id/gskh_001…)
3. 신라는 네 단계에 걸쳐 고구려 주민을 받아들였다
신라 사회에 고구려계 주민이 편입된 과정은 다음 네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흡수: 관구검 침공 전후 남하한 고구려계 주민
《수서》는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이후 옥저 방면으로 이동한 주민 가운데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신라인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신라 형성기에 고구려계 남하 주민이 편입되었다는 전승이다.
두 번째 흡수: 고구려·백제 전쟁기의 집단 귀순
《수서》는 고구려인들이 서로 이끌고 신라로 귀순하여 신라가 강성해졌다고 하였다. 고구려 주민의 유입이 신라의 인구와 군사력 증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이다.
세 번째 흡수: 고구려 남부 영토와 주민의 편입
신라의 북방 진출은 진흥왕대부터 본격화되었고, 문무왕대에는 고구려 남부 지역과 주민의 대규모 편입으로 이어졌다. 중국 사서는 문무왕이 고구려에서 이탈한 주민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한다.
«法敏納高麗叛亡之衆。
“법민이 고구려에서 이탈해 온 무리를 받아들였다.”»
이어 신라가 백제의 옛 땅과 고구려 남부를 차지했다고 적었다.
«旣盡有百濟之地,及高麗南境。
“이미 백제의 땅과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모두 차지하였다.”»
"중국 사서의 신라 영토 확장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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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지리지 역시 신라가 옛 고구려 남부에 세 주를 설치했다고 명시한다.
«於故高句麗南界置三州。
“옛 고구려 남쪽 경계에 세 주를 설치하였다.”»
그 세 주가 한주·삭주·명주였다. 이는 신라가 빈 영토만 차지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성읍과 촌락, 그곳에 살던 주민을 함께 통치체제 안에 편입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남부 편입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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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흡수: 보덕국 왕족과 주민의 신라 편입
고구려 멸망 후 안승을 중심으로 세워진 보덕국도 결국 신라에 흡수되었다. 신라는 안승에게 김씨 성을 내리고 중앙 귀족으로 편입했다.
«徵報德王安勝爲蘇判,賜姓金氏。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렸다.”»
고구려 부흥국의 왕이 신라 왕실의 성을 받고 중앙 관직에 들어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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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성의 저항이 진압된 뒤에는 주민들이 신라 남부의 여러 주와 군으로 옮겨졌다.
«徙其人於國南州郡。
“그 주민을 나라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이는 고구려 부흥세력의 주민이 신라 각지에 분산·정착했음을 의미한다. "보덕성 주민의 이주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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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인의 옛 관등을 신라 관등으로 환산하여 관료조직에 편입했고, 고구려인으로 황금서당을, 보덕성 주민으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편성하였다. 고구려계 주민이 단순한 피난민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신라의 관료와 군인, 지방 주민으로 재편된 것이다. "《삼국사기》 직관지의 고구려인 관등 편입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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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신라를 단일하고 고립된 종족국가로 설정한 뒤 고구려와 전혀 다른 계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료와 맞지 않는다. 신라는 건국 기층부터 조선 유민을 포함했고, 국가 성장과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주민을 거듭 받아들였으며, 멸망한 고구려의 남부 주민과 부흥세력까지 흡수했다.
4. 백제 역시 고구려·부여 계통과 분리되지 않는다
통일신라가 흡수한 또 하나의 큰 주민집단인 백제도 고구려와 완전히 별개의 계통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백제 시조 온조의 아버지를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기록한다.
«百濟始祖溫祚王,其父鄒牟,或云朱蒙。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이며, 혹은 주몽이라고 한다.”»
또한 백제 왕실과 고구려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명시한다.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그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
db.history.go.kr/item/compar…)
《수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百濟之先,出自高麗國。
“백제의 선조는 고구려국에서 나왔다.”»
"《수서》 백제전 원문" (
db.history.go.kr/ancient/lev…)
결국 통일신라는 조선 유민을 기층으로 한 사로·진한 사회 위에서 성장하여 고구려 남부 주민, 보덕국 주민, 백제 주민을 함께 통합한 국가였다. 이후 한국인의 형성과정을 ‘신라계’라는 한 단어로만 설명하더라도, 그 신라계 안에는 이미 고구려계와 부여계 주민이 대규모로 포함되어 있었다.
5. 발해는 북방에서 고구려를 계승했다
고구려 멸망 뒤 남부 주민과 부흥세력 일부가 신라에 편입되었다면, 북방에서는 발해가 고구려의 영토·주민·국가의식을 계승하였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이었다.”»
이는 후대 역사가의 평가가 아니라 발해가 외교문서에서 직접 밝힌 국가적 자기 인식이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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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시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인식했다.
«渤海郡者,舊高麗國也。
“발해는 옛 고구려국이다.”»
"일본 사료의 발해 인식" (
db.history.go.kr/item/compar…)
일본 사료에는 발해 사신을 ‘고려사(高麗使)’, 발해왕 대흠무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부른 사례도 있다. "‘高麗國王大欽茂’ 기록" (
db.history.go.kr/item/compar…)
《구당서》는 대조영의 계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大祚榮者,本高麗別種也。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이어 대조영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결합하여 당군에 대항했다고 기록한다.
«祚榮合高麗、靺鞨之衆。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합쳤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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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 첫머리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에 붙어 있던 속말말갈”이라고 기록했지만, 같은 기사 안에서도 대조영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했고 고구려·말갈 병력을 이끌었다고 기록한다.
«及高麗餘種東走。
“고구려의 남은 무리와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
«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
“대조영은 고구려와 말갈 병력으로 이해고를 막았다.”»
따라서 《신당서》의 첫 문장만 떼어 발해를 단순한 말갈국가로 규정할 수 없다. 그 기사 자체가 발해 건국의 고구려 주민과 고구려 병력을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신당서》 발해전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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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수서》는 속말부와 불열 동쪽의 숙신계 집단을 구분하여 기록했다.
«粟末部,與高麗相接。
“속말부는 고구려와 서로 접해 있다.”»
«自拂涅以東……卽古之肅愼氏也。
“불열에서 동쪽은……곧 옛 숙신씨이다.”»
즉 말갈이라는 포괄적 명칭 아래 여러 집단이 존재했다. 속말말갈이라는 명칭 하나만으로 대조영 집단 전체를 흑수말갈이나 후대 여진과 동일시하는 것은 사료 내부의 구분에도 맞지 않는다. "《수서》 말갈전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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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는 말갈계 주민도 참여했지만 국가의 영토의식과 대외적 정체성은 고구려 계승에 놓여 있었다. 다민족적 주민구성을 근거로 고구려 계승 자체를 부정한다면, 고대의 거의 모든 국가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은 발해 자신의 국서, 일본의 외교 기록, 《구당서》의 대조영 계통 기록이 서로 교차하여 증명한다.
6. 고려는 국호만 빌린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계승을 국가적으로 선언한 나라였다
신라 말 패서 지역에서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토착 호족세력이 성장했다. 평주 호족계에서는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大毛達)’을 사용한 사례가 나타난다.
«直胤大毛達,徙居平州。
“직윤 대모달이 평주로 옮겨 살았다.”»
‘대모달’은 고구려의 고위 무관 명칭인 대모달·대모달 계통의 칭호다. 패서 호족이 고구려식 칭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고구려계 정치문화와 지역적 기억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패서 호족과 대모달 관련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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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차지한 지역에 대해 《고려사절요》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弓裔據有高句麗之地,都鐵圓,國號泰封。
“궁예가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여 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궁예 정권의 공식 국호는 태봉이었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후고구려’라고 부르는 것과 궁예 정권이 공식적으로 고구려 국호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고려사절요》 궁예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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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건은 태봉을 무너뜨리고 즉위하면서 국호를 분명히 ‘고려’라고 정하였다.
«太祖卽位于布政殿,國號高麗,改元天授。
“태조가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로 고쳤다.”»
"《고려사》 태조 즉위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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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후대 사람이 왕건의 국가를 편의상 고려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왕건과 건국세력이 태봉이라는 기존 국호를 없애고 국가의 공식 명칭으로 고구려의 국호인 고려를 선택한 것이다.
태조는 폐허가 된 평양에 여러 지역 주민을 옮겨 살게 하고 서경으로 삼았다.
«太祖元年,以平壤荒廢,量徙諸州民以實之……尋爲西京。
“태조 원년 평양이 황폐해지자 여러 주의 주민을 옮겨 채우고……곧 서경으로 삼았다.”»
"《고려사》 평양·서경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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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다시 건설하여 서경으로 삼은 것은 상징에 그치지 않는 국가적 계승사업이었다.
그 계승의식은 거란과의 외교담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서희는 소손녕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곧 옛 고구려이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고려사》 서희 외교담판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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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언은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니다. 거란과 국경을 협상하는 국가대표가 영토와 국호의 근거로 제시한 고려의 공식적인 국가 인식이다. 고려가 고구려와 무관하면서 이름만 빌렸다면 국경협상에서 “우리나라는 곧 옛 고구려”라고 선언하고 평양 경영을 계승의 근거로 내세울 수 없었다.
6.5패강·패서 지역은 고려 건국의 고구려계 인적·영토적 기반이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왕건이 어느 날 갑자기 고구려의 국호를 빌려 쓰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고려가 건국된 송악과 그 배후인 패강·패서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신라의 직접 지배가 뒤늦게 이루어진 변경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성장한 호족들은 고구려식 칭호를 사용했으며, 궁예와 왕건 정권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는 서해도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西海道本高句麗之地。
“서해도는 본래 고구려의 땅이다.”»
이어 신라가 그 지역을 병합했으나 신라 말에는 궁예가 차지했고, 왕건이 즉위한 뒤 전 지역을 확보했다고 기록한다.
«新羅遂幷之。及其季世,爲弓裔所據。太祖旣立,盡有其地。
“신라가 마침내 이곳을 병합하였다. 신라 말에는 궁예가 차지하였고, 태조가 즉위한 뒤 그 땅을 모두 소유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서해도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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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고구려의 땅 → 신라의 병합 → 궁예의 점유 → 왕건의 고려’라는 패강·서해 지역의 정치적 계승 순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신라의 패강 지역 지배는 통일 직후부터 확립된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지만, 신라가 패강 지역에 본격적으로 군현을 설치한 것은 그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748년이었다. 《삼국사기》 경덕왕 7년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遣阿湌貞節等,檢察北邊,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아찬 정절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살피게 하고, 비로소 대곡성 등 14개 군현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비로소[始]’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신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패강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한 것이 아니라 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대곡성을 중심으로 군현 설치를 시작했다. "《삼국사기》 경덕왕 7년조" (
db.history.go.kr/item/compar…)
781년에도 신라왕은 패강 남쪽의 주와 군에 사신을 보내 민심을 위무해야 했다.
«發使安撫浿江南州郡。
“사신을 보내 패강 남쪽의 주와 군을 위무하였다.”»
"《삼국사기》 선덕왕 2년조" (
db.history.go.kr/id/sg_009r_…)
782년에는 한산주의 백성을 패강진으로 옮겼다.
«王巡幸漢山州,移民於浿江鎭。
“왕이 한산주를 순행하고 백성을 패강진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선덕왕 3년조" (
db.history.go.kr/id/sg_009r_…)
783년에야 아찬 김체신을 대곡진군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군사통치 체제를 갖추었다. 따라서 신라가 패강 지역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진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직접 지배를 시도한 것은 고구려 멸망으로부터 약 114~115년이 지난 뒤였다.
패강진이 설치된 782~783년부터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822년까지는 약 40년이다. 그러므로 패강 지역이 신라 중앙정부의 비교적 안정적인 직접 지배를 받은 기간을 “50년 남짓”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김헌창의 난 이후 신라 하대의 왕위쟁탈과 지방분열이 심해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은 계속 약화되었다.
마침내 898년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차지하고 송악에 도읍하였다.
«弓裔取浿西道及漢山州管內三十餘城,遂都於松岳郡。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군에 도읍하였다.”»
"《삼국사기》 효공왕 2년조" (
db.history.go.kr/id/sg_050r_…)
904년에는 패강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스스로 투항하였다.
«浿江道十餘州縣,降於弓裔。
“패강도의 10여 주와 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효공왕 8년조" (
db.history.go.kr/item/compar…)
이는 패강 지역이 신라 왕경에서 파견한 관리의 통제를 받는 일반적인 지방이 아니라, 신라 말에는 각 성과 주현이 독자적으로 귀부 대상을 결정할 수 있었던 호족 지배지역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패강 지역 호족은 고구려의 ‘대모달’을 칭하였다
패강 지역에서 고구려의 정치적 기억이 유지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평주 호족 박직윤의 칭호다. 고려시대 묘지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新羅之季……直胤大毛達,徙居平州,管八心戶爲邑長。
“신라 말에……직윤 대모달이 평주로 옮겨 살면서 팔심호를 관할하는 읍장이 되었다.”»
‘대모달(大毛達)’은 신라의 관등이 아니라 고구려의 ‘대모달(大模達)’에서 나온 고위 무관 칭호다. 즉 옛 고구려 지역인 평주의 지배자가 신라식 관등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고구려식 장군 칭호인 대모달을 사용하여 주민을 다스린 것이다. "평주 호족과 대모달 기록" (
db.history.go.kr/diachronic/…)
평주는 고구려 때 다지홀이라 불렸던 곳이며, 인근 재령은 고구려의 남부 중심지였던 한성으로 비정된다. 검모잠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운동도 이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역 통치자가 고구려식 대모달을 칭했다는 사실은 패강·패서 지역에 고구려계 주민과 정치문화가 계속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궁예는 패강 지역에서 고구려의 복수를 건국 명분으로 내세웠다
궁예는 패서도와 한산주의 성들을 장악하고 송악을 근거지로 삼은 뒤, 901년 왕을 칭하면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했다.
«往者,新羅請兵於唐,以破高句麗。故平壤舊都,鞠爲茂草。吾必報其讎。
“지난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요청하여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그 때문에 평양의 옛 도읍이 잡초로 뒤덮였으니,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 궁예열전 원문" (
db.history.go.kr/item/compar…)
궁예는 901년 처음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고, 904년 마진으로 바꾼 뒤 다시 태봉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궁예 정권을 통칭하여 ‘후고구려’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국호의 변천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왕을 칭할 때 내세운 정치적 명분이 고구려의 복수와 평양 옛 도읍의 회복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궁예가 신라 왕족 출신이면서도 신라의 계승이 아니라 고구려의 복수를 선언한 것은 그가 장악한 패강·패서 지역 주민에게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그 지역에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왕건과 패강 호족이 태봉을 대신하여 고려를 세웠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송악군의 유력자로서 궁예에게 송악을 귀부시켰다.
«世祖爲松嶽郡沙粲,以郡歸于裔。
“세조가 송악군의 사찬으로 있으면서 군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왕륭은 궁예에게 송악에 성을 쌓고 자신의 맏아들 왕건에게 그곳을 맡기도록 건의하였다.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
“대왕께서 조선·숙신·변한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하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제 맏아들에게 그곳을 맡기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고려사절요》 왕건 즉위 전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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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송악의 왕건 가문은 궁예에게 단순히 복종한 지방관이 아니라, 송악성과 패서 지역을 기반으로 궁예 정권의 영토 확장과 국가 건설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평산 박씨·황주 황보씨·평산 유씨·동주 김씨·신천 강씨 등 패강 지역 호족들은 왕건 가문과 혼인·군사적으로 결합하였다. 이들은 태조의 왕후와 부인 가운데 3명의 왕후와 8명의 부인을 배출할 정도로 고려 초기 지배층의 중심이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도 “임진강 이북에서 패강진 일대에 이르는 지역이 고려왕조의 모태였다”고 정리한다. "패강진 호족과 고려 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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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송악·패서 세력을 기반으로 처음 고려를 세웠다가 국호를 마진·태봉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중심을 옮긴 뒤, 왕건과 그를 지지한 세력은 궁예를 축출하였다. 왕건은 즉위하면서 태봉이라는 국호를 없애고 다시 고려라는 이름을 공식 국호로 정했다.
«太祖卽位于布政殿,國號高麗,改元天授。
“태조가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로 고쳤다.”»
왕건의 고려 건국은 경주 신라왕실이 고구려의 이름을 빌려 세운 국가가 아니었다. 옛 고구려 땅인 송악·패강·패서 지역의 호족과 무장세력이 자신들의 지역적·역사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운 국가였다.
패강 지역이 증명하는 고려의 계승 당위성
패강 지역의 역사를 연결하면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패강·서해 지역은 《고려사》가 직접 “본래 고구려의 땅”이라고 기록한 지역이다.
둘째, 신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 이곳을 안정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 748년에야 14개 군현을 설치했고, 782~783년에 이주민과 군진을 배치하여 본격적인 지배를 시작했다.
셋째, 패강진 설치부터 김헌창의 난까지 신라의 안정적 직접 통치기간은 약 40년, 즉 50년 남짓이었다. 신라 하대의 내란과 지방분열 이후에는 호족의 자립성이 커졌고, 898~904년에는 패서·패강의 여러 성과 주현이 궁예 정권으로 넘어갔다.
넷째, 평주 호족은 고구려식 관직인 대모달을 칭했다. 이는 패강 지역에 고구려의 주민기반과 정치적 기억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궁예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복수를 선언하고 처음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 뒤에는 송악의 왕건과 패강 지역 세력이 정권을 교체하고 다시 고려라는 국호를 확정했다.
여섯째,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주도한 핵심 세력은 왕건의 송악 세력과 패강진 일대의 호족들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단순한 국호 차용이 아니다. 옛 고구려 영토, 그 지역의 주민, 고구려식 칭호를 사용한 호족, 고구려 복수를 내세운 건국명분, 왕건의 고려 국호 회복이 하나로 이어진 결과다.
동북공정식 논리는 왕건의 성이 고씨가 아니라는 사실과 고구려 멸망 후 시간적 간격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왕조의 계승은 왕실의 성씨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고려를 세운 지역이 옛 고구려 땅이었고, 그 지역 주민과 호족이 고구려의 정치적 기억을 유지했으며, 그들이 건국한 국가가 스스로 고려를 칭하고 평양을 서경으로 복구했다는 사실이 더 직접적인 계승의 증거다.
패강·패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고려는 신라 왕경에서 고구려를 관념적으로 차용한 국가가 아니라, 옛 고구려 남부의 주민과 지역세력이 국가의 주체가 되어 세운 고구려 계승국이었다.
7. 고려는 발해 왕족과 유민까지 받아들여 남북 고구려계 주민을 다시 통합했다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자 세자 대광현과 발해 지배층·유민이 고려로 들어왔다. 《고려사절요》는 그 규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世子大光顯……率其餘衆,前後來奔者數萬戶。
“세자 대광현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왔으며, 전후로 귀순한 사람이 수만 호였다.”»
고려 태조는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리고 고려 왕실의 종적에 붙였으며, 발해 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賜光顯姓名王繼,附之宗籍,使奉其祀。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내리고 왕실 족보에 붙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대광현과 발해 유민 수용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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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발해 왕족을 일반적인 외국 망명객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다. 고려 왕실의 성을 내리고 왕실 계보에 편입하여 발해 왕실의 제사까지 보존하게 한 것이다.
태조는 거란이 발해와 맹약을 맺고도 이를 멸망시킨 일을 ‘심히 무도하다’고 비판하며 국교를 끊었다.
«背盟殄滅,此甚無道……遂絶交聘。
“맹약을 저버리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하다……마침내 교빙을 끊었다.”»
"《고려사》 태조의 거란 단교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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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고구려 남부 주민과 보덕국을 흡수했다면, 고려는 다시 신라·후백제 지역을 통일하고 북방 고구려 계승국인 발해의 왕족과 수만 호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고구려계 주민은 신라와 발해라는 두 경로를 거쳐 고려 사회 안에서 다시 결합하였다.